한국 문학의 뿌리, 사람 박경리
교류협력부 손수지 선임연구원
은행원에서 작가로
흔히 ⟪토지⟫를 쓴 소설가로 잘 알려진 박경리는 사실 시로 먼저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놓았다. 박경리는 등단 전인 1954년 상업은행 용산지점 행원으로 근무하며 사보에 본명 '박금이'로 장편시 「바다와 하늘」을 발표했다. 이후 문인 김동리의 권유로 박경리는 1955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은행 사보 ⟪천일⟫에 실린 「바다와 하늘」 (이미지 제공: 우리 1899 우리은행 역사관)
⟪토지⟫,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의 작품들
박경리 문학의 정점은 ⟪토지⟫(1969~1994, 26년 집필)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그 이전부터 켜켜이 쌓여 있었다. 1959년 첫 창작집 ⟪표류도⟫를 시작으로, 통영을 배경으로 한 다섯 딸의 이야기 ⟪김약국의 딸들⟫(1962), 6·25 격랑기를 다룬 ⟪파시⟫(1964), 전쟁 속 여성의 삶을 그린 ⟪시장과 전장⟫(1965) 등 장편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토지⟫ 탈고 후에도 시집 ⟪우리들의 시간⟫(2000),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2003, 미완), 에세이 ⟪생명의 아픔⟫(2004) 등을 펴냈고, 타계 한 달 전인 2008년 4월에도 ⟪현대문학⟫에 시 3편을 발표하며 생명이 꺼지는 순간까지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박경리 작가의 집필공간 재현 전시실(출처: 박경리 뮤지엄 홈페이지)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된 여성 문인들의 우정
저자와 독자로 시작된 박경리와 박완서의 인연은 문예지 ⟪한국문학⟫이 박완서에게 ‘박경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 청탁하면서 이어졌다. 1975년 8월 박완서가 보낸 편지에는, 박경리의 사위 김지하의 출감 후 재구속 사실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때 우리가 마음껏 축하하고 흥분했던 게 잘못이었다면, 다시는 거들떠도 보지 않을 테니, … 손자에게 아빠가 돌아올 수 있는 날이 있게만 해달라고 빌 뿐입니다.”라며 그를 위로했다. 그다음 호에서 박경리는 박완서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 편지의 원본이 지금 문학관에 남아 있다. 박경리는 답장에서 박완서의 따뜻함에 ‘친지의 편지를 쥔 것 같다’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편지에는 한 명의 작가가 아닌 할머니로서 손자를 보살피고 사위를 걱정하는 박경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후 두 문인의 우정은 1988년 남편과 외아들을 잃은 박완서를 박경리가 위로하며 견고해진다. 박경리는 박완서에게 손수 지은 밥을 먹이며 “먹어야 살고 살아야 글을 쓰고 글을 써야 치유가 된다”고 다독였다. 박경리 역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겪어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후에 박완서는 박경리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문인장도 치르며 박경리의 마지막을 지켰다.

<박경리가 박완서에게 보내는 편지> (국립한국문학관 소장. 故 이문구 기증자료)
토지문화재단, 후배들의 뿌리가 되다
“사고(思考)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능동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여 능동적인 생명을 생명으로 있게 하기 위하여 작은 불씨, 작은 씨앗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 토지문화재단 설립의 뜻입니다.”
- 토지문화재단 설립자, 박경리
박경리는 1996년 사재를 들여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원주 자택 인근에 창작실을 지어 후배 작가들에게 무상으로 내주었다. 등단은 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젊은 작가들이 이곳에서 몇 달씩 머물며 오직 글쓰기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박경리는 입주 작가들을 손수 밥을 지어 먹이고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나눠주며 살뜰히 챙겼다. 그가 일군 이 창작실은 오늘날까지도 운영되며, 수많은 작가들의 문학적 뿌리가 되어주고 있다.
탄생 100주년, 그가 남긴 것들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 그가 뿌리내린 문학은 여전히 자라고 있다. 통영에서는 기념 학술대회가, 서울에서는 후배 문인들이 모인 기념문학제가 열렸다. 지난 3월에는 미공개 육필 시 47편을 모은 유고시집 ⟪산다는 슬픔⟫이 출간되어 그의 내밀한 목소리가 뒤늦게 독자들과 만났다. 이 가을, 한국 문학에 깊이 뿌리내렸던 한 사람을, 그가 남긴 작품과 함께 그리워해본다.
[참고자료]
· 토지문화재단 홈페이지
· 장영은, ⟪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민음사, 2023.
· 한국문학사, 박경리(朴景利) 선생님께 “8월의 편지”(박완서), ⟪한국문학⟫ 3권 8호, 1975. 8.
· 한국문학사, “8월의 편지를 받고” 박완서(朴婉緖)씨에게(박경리), ⟪한국문학⟫ 3권 9호, 1975. 9.
· [박경리탄생100년] ① 은행원 '박금이'에서 '토지' 거장으로...우리은행서 만난 작가 박경리, 폴리뉴스, 2026.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