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에 「파리장서」를 읽다
자료구축부 서영인 부장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
3.1 독립선언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상경한 김창숙(金昌淑)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 대표 중 유림(儒林) 인사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통탄했다. 조선왕조의 지도 이념이었던 유교를 신봉했던 유학자로서 망국의 책임이 유교에 있다는 책임의식, 세상이 유교를 일컬어 고루하고 썩었다고 매도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자기 객관화,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전 국민적 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유교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 짧은 탄식 안에 응축되어 있다. 김창숙, 그리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유림들은 통탄에 그치지 않았다. 독립선언에 이어 밖으로 조선의 사정을 호소하는 국제운동을 펼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파리장서 운동’의 시작이었다.

독립선언서(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망국대부(亡國大夫)로서 늘 죽을 곳을 찾지 못해 한이었거늘, 늙은이가 죽을 곳을 얻은 날이구나.”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서한을 작성하기 위해 김창숙이 방문하자 곽종석(郭種錫)은 김창숙의 손을 잡고 반겼다고 한다. 전국 유림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영향력 있는 대표가 필요한 바, 김창숙이 떠올린 것은 곽종석이었고, 이에 모두 찬동하였다. 곽종석이 국제사회에 망국의 한과 독립의 의지를 호소하는 글을 쓴 것은 처음은 아니었다. 곽종석은 이미 1896년 만국공법(萬國公法)의 기본정신에 따라 일본의 침략을 제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을 구미열강의 공사관에 전달한 바 있다. 퇴계학파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한 곽종석은 전 세계에 통하는 이치를 전제하고, 그 이치를 따르지 않고 이웃을 해하는 침략을 비판하며, 만국이 지켜야 할 법도에 호소했다. 그렇다고 해서 곽종석이 당연한 진리를 구하느라 현실을 경시하는 문약한 선비였던 것은 아니다. 곽종석은 「파리장서」가 국제사회에 전해질 외교문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인지하였고, 혹여 흥분이 넘치거나 사실을 과장하는 일이 있을까 문장을 고치고 또 고쳤다. 「파리장서」를 가지고 서울로 향하는 김창숙을 위해 완성된 「파리장서」를 한 행씩 찢어 짚신으로 만들어 일본 경찰을 피할 수 있게 할 만큼 주도면밀했고, 상해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인사들을 소개해 주며 제자이자 동지인 김창숙의 험로(險路)를 걱정하고 배려했다. 「파리장서」 대표 작성을 수락하고, 김황(金榥)과 장석영(張錫英)에게 초고를 부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김창숙과 곽종석이 머리를 맞대 「파리장서」의 최종본은 완성되었다. 서울로 상경한 김창숙에게 전달된 또 하나의 「파리장서」는 호서 지역의 유림들이 작성한 것이었다. 회의 끝에 곽종석의 것을 최종본으로 선택하고 김창숙이 모은 120명의 서명에 김복한 등 호서 지역 17인의 서명을 포함하여 최종 137인이 서명한 「파리장서」 발송본이 완성되었다. 곽종석과 김창숙이 대표 집필한 셈이지만 「파리장서」에 담긴 문장은 전국 유림 세력들의 집합적 논의 끝에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1924년 김창숙(1열 왼쪽, 심산기념사업회 소장)

곽종석 초상(산청유림독립운동기념관 소장)
“하늘이 만물을 낼 때 반드시 합당한 능력을 주었다. 작은 고기나 조개나 벌레도 모두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거늘, 사람이 스스로 사람이 되고 나라가 스스로 나라가 되니 그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이 반드시 있다.”
100년도 전에 쓰인 「파리장서」를 읽다가 문득 “작은 고기나 조개나 벌레”에 눈길이 머문다. 나라의 독립을 말하면서 고기나 조개나 벌레를 불러온 까닭은 우리의 작은 나라를 스스로 낮추기 위해서는 물론 아니다. 오히려 고기나 조개나 벌레나 세상 모든 만물이 스스로 자유로울 권리를 타고났음을, 그리하여 인간이나 세계의 존엄이 크고 작음이나 강함과 약함에 있지 않음을 역설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고기와 조개나 벌레도 평화롭게 자신의 삶을 사는 세상, 그곳에서는 응당 식민지도 약소국도 없을 것이며 오직 평화만 있을 것이다.
‘파리평화회의’가 내세운 평화가 「파리장서」가 호소한 평화와는 다른 것일 수 있다.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연합국과 패전국 사이의 평화조약이란, 사실상 패전국에 대한 전쟁 책임과 연합국의 전리품 나누기의 명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패전국에 침략당한 몇몇 나라가 독립되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평화와 세계 열강의 평화는 이미 동등하지 않다. 경남의 끝 거창에 앉아 상해와 파리 소식을 듣던 곽종석이나, 「파리장서」를 품에 넣고 중국 땅에서 상투를 자른 김창숙이 저간의 사정을 몰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마땅히 우리가 동등한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또 주장해야 하는 절박함을 무모하다고 할 수 없다.

「파리장서」 곽종석 친필 원본, 곳곳에 가필과 수정의 흔적이 있다.
“차라리 일시의 위협에 굴복하여 압박을 받을지언정, 그 마음은 천만년을 갈지라도 한국 민족임을 잊지 않을 것이니, 그 본래의 마음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김창숙의 호는 ‘벽옹(躄翁)’이다.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뜻이다. 1927년 중국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된 데서 비롯된 호이다. 그리고 그 마비된 다리로 해방 후에는 전국 유림 개혁운동을 벌였고, 이승만 독재에 반대했다. 곽종석의 호는 ‘면우(俛宇)’이다. 집의 처마가 낮아서 드나들 때마다 머리를 숙여야 하는 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집을 드나들 때마다 머리를 숙이며 겸손과 한결같음을 새기려 했던 것이 아닐까. 곽종석은 ‘파리장서 사건’이 발각되어 투옥되었고, 2년형이 구형되자 따로 공소하지 않았다. 병이 심하여 같은 해 6월 출옥했고 8월에 별세했다.
이제 구주(歐洲)의 천지는 그 참혹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걷히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부질없는 총칼을 거두고 제법 인류의 신생을 생각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소학교 교원의 허리에서 그 장난감칼을 떼어놓을 날은 언제일지? 숨이 막힙니다.

염상섭의 ⟪만세전⟫ (1924년) (국립한국문학관 소장)
잠시 시간을 건너뛰어 염상섭이 쓴 ⟪만세전⟫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보자. 염상섭은 1차 대전 종전 후 평화 무드의 국제정세와 여전히 침략자의 핍박 아래에 있는 조선의 현실을 대비한다. 염상섭이 읽은 ‘만세(萬歲)의 전(前)’ 풍경이다. 그들의 평화가 우리의 평화가 아닌 현실, ‘만세 직후’의 「파리장서」에서 “진실로 만국이 평화롭다 할진대, 우리 한국도 만방의 하나이니 어찌 평화롭지 않겠는가.”라고 호소한 문장과 다르지 않다. 유교 질서를 기반으로 독립을 도모하고 실천한 김창숙, 곽종석과 동경 유학파 출신으로 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염상섭의 현실인식이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들을 구 지식인이라 부르든, 모던보이라 부르든 침략과 쟁탈의 현실에서 그들이 바라는 바는 평화와 우애였기에, 그들은 시대를 공유하면서 문장으로 연대했다. 덧붙이자면 만세전의 위 결말은 해방 전 판본에는 없는 내용이다. 염상섭은 해방 후 개작을 거쳐서야 ‘소학교 교원의 허리에 맨 칼’을 쓸 수 있었다. 쓸 수 없는 현실이 그만큼 엄혹했을 것이다. 3.1절을 맞아 「파리장서」가 전하는 절실함과 담대함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했다.
심산김창숙선생 기념사업회, 「파리장서 95주년 기념 학술회의-파리장서 운동의 재조명」, 2014.
유림독립항쟁 파리장서 100주년 기념 행사 자료집, 2019.
허권수, 「면우 곽종석의 생애와 학문」, ⟪면우 곽종석의 학문과 사상⟫, 도서출판 술이, 2010.
곽진, 「곽종석의 생애와 학문 성향」, 경남문화연구원 학술대회 자료, 2023.
임경석, 「유교 지식인의 독립운동-파리장서의 작성경위와 문안변동」, 대동문화연구 37집,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