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弘文館 纂輯校正;朴容大 等 奉勅纂輯.
4침안 선장
신연활자본
漢城 : 弘文館, 1908.
250卷 51冊 : 각권 四周雙邊 半郭 20.3×13.2 cm, 有界, 10行27字, 上下向黑魚尾
기타 주기사항:
250卷 49冊과 卷首 1책 및 正誤 1책을 모두 갖춘 完帙本.
권수 앞표지 이면에 정인보 친필 서후가 별지로 붙어 있고, 정인보의 장서인과 이현재의 소장인이 압인되어 있음.
어제 서문 이래와 전체 책의 첫 장에 김택영의 장서인이 압인되어 있음.
권수의 마지막 장 하단에는 김택영의 외손자 이현재(李賢在)의 장서인이 압인되어 있음.
[목차]
卷首: 高宗과 李完用의 서문 및 奉勅纂輯諸臣의 직함과 인명, 增補文獻備考凡例 및 增補文獻備考 總目錄
1冊~49冊: 增補文獻備考 권1 象緯考에서 권250 藝文考까지의 본문
正誤: 增補文獻備考의 正誤表
[내용]
51책의 방대한 유서 《증보문헌비고》 완질본이다.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한 저명한 문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책의 원본이다. 책의 표지 이면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친필 서후가 덧붙여져 있는데 이 책의 특별한 가치와 소장 경위 및 소장자의 중국 이주와 책의 운명을 인상 깊게 서술하였다. 책에는 소장자인 김택영과 그의 외손자 이현재, 그리고 서후를 쓴 정인보의 장서인이 함께 압인되어 있어 책의 가치를 입증한다.
[자료의 특성 및 가치]
250권에 권수와 정오를 합해 모두 51책에 이르는 방대한 유서인 《증보문헌비고》의 완질본이다. 이 책은 기울어 가는 대한제국이 문화적 역량을 기울여 편찬하여 1908년에 간행한 유서로서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문물제도 전반을 총정리 하였다. 국립한국문학관 소장본은 근대의 역사가이자 문인, 독립운동가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책의 원본이다.
51책 전체 책의 첫 장에는 「창강거사(滄江居士)」, 「김택영인(金澤榮印)」의 장서인이 찍혀 있다. 이 책이 특별하고 가치 있는 이유는 권수의 표지 이면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친필 서후가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다. 위당의 서후는 이 책에 숨겨진 역사와 사연을 추적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서후 앞뒤에는 「정인보인(鄭寅普印)」과 「미소산인(微蘇山人)」, 「위당(爲堂)」, 「표표유능운기(飄飄有凌雲氣, 표표히 구름 위로 솟구치는 기운이 있다)」의 인장 4방(方)이 찍혀 있는데 모두 정인보의 것이다.
김택영은 1903년 국가적 사업인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끝 무렵에 편찬위원직을 사임하고 중국에 망명하였다. 1908년 책이 발간되고, 1909년 그가 잠깐 귀국했을 때 황제로부터 1질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바로 중국으로 돌아가야 해서 이 책은 친분이 있던 이원승의 차지가 되었다. 김택영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고국의 외손자 이현재에게 그 책을 되찾게 하여 길이 소장하라고 유언하였다. 국립한국문학관 소장본이 그 실물이다.
정인보는 권수(卷首) 앞표지 이면에 붙어있는 서후(書後)에서 김택영이 목숨을 끊으면서 이 책을 굳이 되찾으려 한 이유를 밝히면서 책에 얽힌 사연을 인상 깊게 서술하였다. 나라를 버린 망국의 유민(遺民)으로서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저 책은 버릴 수 없고, 자신은 곧 죽을 몸이나 조선에 남은 유일한 혈육이 멀리서 길이 간직하기를 바랐으며, 자신의 손때가 묻고 기운이 스며 있어서 그 책을 통해 나라가 망하여 집안이 유랑한 참담한 변고의 옛 자취를 되새길 수 있다는 이유 세 가지를 들었다. 조국을 회상하고, 조국에서 영위한 삶을 되살리는 유일한 흔적이었고, 조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혈육에게 물려줄 유일한 유품으로 이 책을 끝까지 보관하라고 하였다.
또 권수의 표지 뒷장에는 「창운실책(滄雲室冊)」이란 장서인이 찍혀 있는데 외손자 이현재의 것이다. 유능한 사업가로 나중에는 사상의학의 보급에 지대한 공적이 있는 인물이다. 그와 그의 세 아들이 끝까지 잘 보관하다가 국립한국문학관에 소장되었다. 뛰어난 문인이자 역사가, 독립운동가의 만년 삶이 녹아 있고 조국을 향한 그리움과 비원(悲願)이 담겨 있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창강 김택영이 하사받은 《문헌비고》 뒤에 쓰다(書金滄江受賜文獻備考後)]
- “안대회, 「김택영 소장 《증보문헌비고》를 지킨 외손 이현재와 정인보의 친필 발문」, 《문헌과 해석》 99, 태학사, 2025, 187–208쪽.” 참조
광무(光武) 연간에 『문헌비고』를 편찬하라고 명하니 한때의 문학하는 선비인 창강 김택영, 우당(愚堂) 윤희구(尹喜求), 무원(茂園) 김헌(金獻, 金敎獻)이 모두 그 일에 참여하였다. 그 뒤에 책이 인출 반사(頒賜)되었으나 창강은 그에 앞서 회남(淮南)으로 피난하였다. 기유년(1909)에 잠시 귀국하여 비로소 그 책을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회남으로 가니 책은 참서(參書) 이원승(李源昇) 차지가 되었다. 창강은 죽기 바로 전년에 외손인 이현재(李賢在) 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내가 하사받은 《문헌비고》를 네가 값을 치르고 돌려받아서 네 집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군이 여러 차례 참서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최근에 참서가 나를 찾아왔길래 그 일을 말했더니 참서는 “저는 책값은 바라지 않고요, 다른 《문헌비고》를 구해와 바꿔주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이군에게 전했더니 이군이 그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창강이 하사받은 책은 마침내 이군 차지가 되었으니 51책의 이 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군이 다른 책을 주고서 이 책을 되돌려 받았을 때 어떤 손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사받은 책은 창강에게는 정말 소중할 테지요. 그러나 벌써 남의 차지가 되었지요. 창강은 나라를 떠나 몸을 깨끗이 지킬 땅으로 갔고요. 사람으로서 차마 버리지 못할 것은 모조리 버리고 도망하고는 그래 책 한 가지는 놓지 못하다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창강이 나라를 뜬 것은 나라를 잊는데 과감해서가 아닙니다. 잊을 수 없는 대단히 깊은 것이 있으나 주택과 친척, 생활환경, 평소의 친구 따위의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변고가 일어날 즈음에 세상에서는 한창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을 때, 그만은 홀로 까마득히 멀리 바다에 떠서 외롭게 타국에 몸을 부쳤으나 그 심경만은 스스로 간직하였습니다. 선택한 방향이 서로 다르니 어찌 함께 놓고 논할 수 있겠는지요? (남들은)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흐리멍텅하게 버리고 등지려고만 애썼다고 여기거나, 하찮은 하나의 책일 뿐인데 오히려 옛날 하사받은 것이라고 잊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무릇 저것(주택 등)들을 버린 것은 이것(책)만을 놓지 않기 위한 까닭입니다.”
어떤 손님은 이렇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기가 구해서 되돌려받지 않고 굳이 이군에게 맡겼을까요?”
나는 또 이렇게 답했다.
“창강이 회남에 살면서 가난하여 그 책을 돌려받을 돈이 없었고요, 또 이미 늙은지라 죽은 뒤의 일을 장담할 수 없었지요. 이군은 외손으로 한 가닥 이어지는 혈육으로 오로지 이 한 사람이라 멀리에서 그를 생각하고, 오래가기를 소망하였으니 그 뜻이 참 애잔합니다.”
그 손님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앞에 하신 말씀으로는 창강이 이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겠고요, 뒤에 하신 말씀으로는 창강이 구태여 이군에게 책을 맡기려는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지금 이 책은 창강이 하사받았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반사(頒賜)했다는 제사(題辭)와 서명이 없어서 성명을 밝혀서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임을 기록하고, 거기에 규장지보(奎章之寶)라는 인장을 찍어주는 옛날 물건과는 같지 않습니다. 또 창강은 스스로 제사를 쓰고 인장을 찍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따로 구한 책과 똑같은 《문헌비고》일 뿐이고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차이가 없다면 또 무엇 하러 구태여 번거롭게 바꾼단 말인가요?”
나는 다시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답니다. 지금 소문에 듣고서 옛일을 더듬어 옛사람이 남긴 유적을 탐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넓은 들은 잡초에 묻혀있고, 촌락은 언덕으로 변하여 모든 것은 옛일이 되었고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서성거리면서 차마 대뜸 발길을 되돌리지 못하니 왜 그럴까요? 그 땅에 남다른 것이 있어서일까요? 오래도록 전해왔기에 그곳에서 옛 형상의 그림자라도 기대한 것이겠지요.
이 책은 창강이 받아서 참서가 소유했었고, 창강이 외손에게 값을 치르고 돌려받으라고 분부하여 이군이 끝내 손에 넣었으니 전해온 내력이 분명합니다. 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최근의 물건이니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물건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은 똑같은 《문헌비고》라고 여기겠으나 아는 사람은 이 책의 때 묻은 책실이나 더러워진 책장을 보고서 집안과 나라의 변고를 은연중에 바라볼 수 있음을 알게 되겠지요. 창강이 지닌 먹 향기가 스며있고, 손가락이 스쳐 지나갔으리니 아마도 남아있는 기운이 있을 것입니다. 설령 제사와 인장이 없더라도 저 잡초에 묻힌 넓은 들과 언덕으로 변한 촌락으로 가득한 풍경과 비교한다면 어떠할까요? 그대가 지금 남다를 게 없는 땅에서 옛 흔적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이 책에 대해서는 번거롭게 바꿨다고 의아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렇게 손님에게 대답하고서 주고받은 대화를 적어서 책 뒤에 붙이게 하였다.
무인년(1938) 윤7월 동래 정인보는 쓰다.
[작가소개]
김택영(金澤榮, 1850~1927):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개성 사람으로 구한말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역사가, 관료, 독립운동가이다. 강위, 이건창, 황현과 함께 한말사대가로 꼽히는 문단의 거장이다. 1905년 이후 중국에 망명하여 남통에 거주하면서 한국의 역사서와 문집 등을 출간하는 편집자로서 활동하면서 문필로서 항일운동을 성원하였다. 문집에 《소호당집(韶濩堂集)》이 있고, 2018년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었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위당(爲堂), 담원(薝園), 미소산인(薇蘇山人).
근대의 한학자, 시조시인, 역사가, 문필가로서 일제강점기에 큰 명망을 누렸다. 연희전문 교수를 지냈고,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을 주도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를 발굴하고 그들의 저술을 출간하는 등 큰 업적을 쌓았다. 해방 이후 감찰위원장을 지냈고, 한국전쟁(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저술에 《담원문록(薝園文錄)》 등이 있다.
[참고자료]
정인보, 《薝園 鄭寅普全集》,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
정양완 옮김, 《薝園文錄》, 태학사, 2006.
여희정, 《정인보의 글쓰기와 민족문화 기획》, 학자원, 2023.
한영규, 《창강 김택영 평전: 중국과 한문을 택한 마지막 문인》, 학자원, 2024.
강민경, 「金澤榮의 1909년 歸國과 安中植 筆 〈碧樹居士亭圖〉」, 《미술자료》 99호, 2021, 30-49쪽.
정구복, 「《문헌비고》의 자료적 성격과 사학사적 의미」, 《진단학보》 106호, 2008, 167-190쪽.
[해제자]
안대회(성균관대학교)








